
1장 태백산의 마지막 밤
숨이 먼저 알았다.
들이쉰 숨이 단전에 닿기도 전에 흩어져 산의 숨과 섞였다. 어디까지가 제 호흡이고 어디부터가 골짜기를 오르는 밤바람인지, 운학은 더 이상 구분하지 않았다. 백이십일 년. 그 세월은 기억이 아니라 몸에 있었다. 무릎 아래 닳아 반들거리는 반석에, 손끝이 스치기만 해도 결 따라 눕는 솔가지에, 자시(子時)가 가까워지면 저절로 느려지는 심장의 박동에.
솔바람이 능선을 넘어왔다. 바람은 그의 도포 자락을 흔들지 않고 통과했다. 몸이 그만큼 비어 있었다. 비운 자리마다 별빛이 고였다.
하늘이 열리고 있었다.
구름 한 점 없는 밤이었으나 그것과는 다른 열림이었다. 백회혈 위로 실낱같은 온기가 드리웠다. 젖은 창호지에 볕이 스미듯, 위에서 아래로, 서두르지 않고. 등선(登仙)의 기운이었다. 태백의 산신도 이 밤을 아는지 짐승 한 마리 울지 않았다. 계곡물 소리마저 한 옥타브 낮게 엎드려 있었다.
운학은 마지막으로 향을 살랐다. 향 연기가 곧게 올라가다가, 사람 키 높이에서 서쪽으로 한 번 굽었다.
바람은 없었다.
그는 연기가 굽은 자리를 오래 바라보다가, 습관처럼 고개를 들었다.
관성(觀星)은 백이십일 년 동안 하루도 거른 적 없는 일과였다. 등선을 앞둔 밤이라 하여 거를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마지막 인사에 가까웠다. 북두는 국자 자루를 동으로 눕혔고, 삼원(三垣)의 담장은 제자리에 단정했다. 인간 세상의 어지러움과 무관하게 별은 언제나 예(禮)를 지켰다. 그것이 그가 별을 좋아하는 이유였다.
자미원(紫微垣)에 이르러, 그의 시선이 멎었다.
담장 안쪽, 제왕의 별 곁. 있어서는 안 될 자리에 별 하나가 서 있었다.
객성(客星)이라 하기엔 빛이 너무 단정했다. 새로 태어난 별의 들뜬 흰빛도, 죽어가는 별의 탁한 붉음도 아니었다. 오래 닦은 청동거울 같은 빛. 그리고 그 빛이—
깜빡였다.
운학은 반석 위에 정좌한 채 오른손을 무릎에 얹었다. 검지가 무릎을 짚었다. 길게. 길게. 길게. 짧게. 별이 명멸하는 간격을 손끝이 받아 적었다. 관성술의 기초는 눈이 아니라 몸이었다. 눈은 속아도 몸에 새긴 장단은 속지 않는다. 스승은 그렇게 가르쳤다.
장, 장, 장, 단.
세 번 길고 한 번 짧다. 삼장일단(三長一短). 별은 같은 가락을 반복했다. 숨 아홉 번을 쉬는 동안 여섯 차례. 흐트러짐이 없었다. 하늘의 일이라기엔 지나치게 정확하고, 사람의 일이라기엔 지나치게 높았다.
운학은 소매에서 낡은 성도(星圖)를 꺼냈다. 스승의 스승, 그 위로 몇 대를 거슬러 오르는 필사본이었다. 자미원 갈피에 끼워진 종이 한 장. 이천 년 묵은 기록이 거기 있었다. 먹이 바래 갈색이 된 글씨.
―서방으로 가는 별이 삼장일단으로 우니, 박사 셋이 낙타를 몰아 그 밑을 따르더라.
그는 종이를 접지 않고 오래 들고 있었다. 손이 떨리지 않는 것이 스스로 낯설었다.
별이 다시 깜빡였다. 장, 장, 장, 단. 그리고 이번에는 미세하게, 서쪽으로 반 치를 미끄러졌다. 별은 움직이지 않는다. 움직이는 별은 별이 아니라 손가락이다. 무언가를 가리키는.
그 순간 정수리의 온기가 두터워졌다. 하늘의 문이 마저 열리는 중이었다. 몸이 가벼워졌다. 반석을 누르던 무게가 한 근씩 덜어져 나갔다. 도포 자락이 바닥에서 반 뼘 떠올랐다. 백이십일 년이 이 밤을 위해 있었다. 오르면 그만이었다. 오르는 데에는 아무 노력도 필요하지 않았다. 익은 열매가 가지를 놓듯, 놓기만 하면 되었다.
별이 울었다. 장, 장, 장, 단.
운학은 눈을 감았다. 위에서 당기는 것과 서쪽에서 부르는 것이 그의 몸 안에서 만났다. 그는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고 한 호흡을 온전히 쉬었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그의 손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성도를 말아 죽통에 넣었다. 향로의 불씨를 손가락으로 눌러 껐다. 재를 흩지 않았다. 반석 곁에 세워 두었던 지팡이를 쥐고, 시렁에서 짚신을 내렸다. 짚신은 삼십 년 전에 삼은 것이었다. 산을 내려갈 일이 없어 한 번도 신지 않은. 그는 정좌를 풀고, 백이십일 년 만에 처음으로 반석 아래 흙을 맨발로 디딘 다음, 짚신을 꿰어 끈을 매었다. 왼발, 오른발. 매듭은 서툴렀다.
몸이 아직 떠 있으려 했다. 그는 단전에 숨을 눌러 담아 제 몸에 무게를 되돌렸다. 열리던 하늘의 문이 머뭇거리는 것이 정수리로 느껴졌다. 그는 일어서서 북쪽 하늘을 향해 세 번 절했다. 이마가 땅에 닿을 때마다 백회의 온기가 한 겹씩 걷혔다. 세 번째 절을 마치자 하늘은 다시 여느 밤하늘이 되어 있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는 나지 않았다. 다만 산의 숨이 다시 그의 숨과 갈라섰다. 짐승이 울었다. 계곡물이 제 소리를 되찾았다.
그는 암자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가져갈 것이 죽통 하나, 지팡이 하나뿐인 살림이었다. 시렁 안쪽 깊은 곳에 손을 넣어, 무명천에 싼 것을 꺼냈다. 부러진 옥 간의(簡儀) 조각. 오래전 이 산을 먼저 내려간 사람이 버리고 간 것이었다. 그 사람도 별을 보았다. 같은 하늘을 보았다. 운학은 조각을 잠시 쥐었다가, 죽통 곁에 함께 넣었다.
“……백이십일 년을 기다려 놓고.”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낮게 말했다.
“하룻밤을 못 참으시는가.”
별은 대답하지 않고 깜빡였다. 장, 장, 장, 단. 여전히 서쪽이었다.
운학은 사립을 밀고 나섰다. 문은 잠그지 않았다. 잠글 것이 없는 집이었다. 능선에 올라서자 발밑으로 구름의 바다가 펼쳐졌고, 그 너머 아득한 서쪽 지평에 인간 세상의 불빛이 벌겋게 번져 있었다. 백이십일 년 전에는 없던 빛이었다. 별빛보다 밝고 별빛보다 어지러운.
하늘로 오르는 길은 그의 등 뒤에서 닫혔다.
그는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첫걸음에 짚신 끈이 풀렸다. 그는 허리를 굽혀 매듭을 다시 묶었고, 고쳐 묶는 그의 정수리 위에서, 별이 한 번 더—이번에는 조금 더 급하게—깜빡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