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좌의서약 4화 무료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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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지켜보는 자들

미행은 이틀 뒤에 붙었다.

정오. 명동 거리. 운학은 최 신부의 심부름으로 초를 사러 나온 길이었다. 인파는 강물 같았다. 그 강물 속에서 돌 하나가 흐르지 않고 있었다.

기감은 눈보다 빨랐다. 등 뒤 왼쪽, 삼십 보. 걸음의 박자가 그와 같았다. 그가 멈추면 반 박자 늦게 멈추는 발소리. 진열창을 보는 척하는 시선의 온도.

운학은 초를 샀다. 값은 이번엔 지폐로 치렀다. 최 신부가 쥐여 준 것이었다. 거스름돈을 받는 동안 유리문에 비친 거리를 읽었다. 회색 점퍼. 야구 모자. 얼굴은 평범했다. 지나치게 평범했다. 기억에 걸리지 않도록 깎아 낸 얼굴.

하나가 아니었다.

길 건너 카페 창가에 하나 더. 찻잔이 삼십 분째 그대로였다. 김이 오르지 않는 차를 앞에 두고 앉아 있는 자는 차를 마시러 온 자가 아니다.

둘. 어쩌면 셋.

운학은 초 꾸러미를 안고 성당 쪽으로 걸었다. 평소의 속도로. 언덕길에 접어들자 인파가 성글어졌다. 그는 골목 하나를 골랐다. 좁고, 꺾임이 두 번 있고, 하늘이 손바닥만 하게 열린 골목.

꺾었다. 첫 번째 모퉁이.

그리고 걸음에서 소리를 지웠다.

경신술의 초입은 몸을 가볍게 하는 것이 아니다. 땅과 다투지 않는 것이다. 그의 짚신이—이제는 최 신부가 사 준 검은 운동화였다—바닥에 닿되 무게를 남기지 않았다. 두 번째 모퉁이를 도는 순간 그는 벽을 세 걸음 밟고 올라 담장 위 어둠에 접혔다.

숨을 골랐다. 하나. 둘.

회색 점퍼가 골목으로 들어섰다. 걸음이 빨라져 있었다. 시야에서 표적을 놓친 자의 걸음. 첫 모퉁이를 돌고, 두 번째 모퉁이를 돌고, 빈 골목을 마주했다.

사내가 멈췄다. 손목을 입가로 가져갔다.

“……놓쳤다. 반복한다, 대상 소실—”

말은 끝나지 못했다.

운학은 담장에서 내려섰다. 소리는 눈이 앉는 만큼도 나지 않았다. 왼손이 사내의 손목을 잡아 입가에서 떼어 냈고, 오른손 두 손가락이 목덜미의 혈을 짚었다. 짚기 직전, 그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해칠 마음이 있는가. 없었다. 잠재울 마음뿐이었다. 손끝의 기운이 맑게 흘렀다.

사내의 무릎이 꺾였다. 운학은 그를 안아 벽에 기대어 앉혔다. 잠든 얼굴이 되었다. 한 시진은 깨지 않을 것이었다.

점퍼 안주머니. 지갑은 없었다. 신분증도 없었다. 대신 사진 석 장.

한 장. 세례식의 운학. 이마가 젖어 있었다. 두 장. 성당 마당을 쓸고 있는 운학. 석 장. 태백산 능선의 위성 사진. 암자 자리에 붉은 동그라미.

운학의 눈이 좁아졌다. 이들은 그가 산을 내려오기 전부터 그를 알고 있었다.

발소리. 골목 입구. 두 번째 미행자였다. 카페의 그자. 여자였고, 손이 코트 안쪽으로 들어가 있었다.

운학은 기다리지 않았다. 축지에 준하는 보법. 다섯 걸음의 거리가 한 걸음으로 접혔다. 여자의 눈이 커지는 속도보다 그의 손이 빨랐다. 코트 안쪽에서 나오던 손목을 잡아 비틀지 않고, 다만 감쌌다.

손안의 것은 총이 아니었다.

묵주였다.

검은 나무 알. 은십자가. 여자는 저항하지 않았다. 대신 또렷한 한국어로, 억양만 살짝 이국인 목소리로 말했다.

“쏘려던 게 아니에요. 이걸 보여 드리려던 겁니다.”

운학은 손을 놓지 않았다.

“묵주를 품고 사람을 쫓습니까.”

“쫓은 게 아니라 지킨 겁니다. 당신을.”

여자가 골목 안쪽, 잠든 사내 쪽으로 턱짓했다.

“그리고 저 사람은 우리 쪽이에요. 초임이라 서툴렀을 뿐. 깨어나면 시말서를 쓰겠죠.”

“우리 쪽이 어느 쪽입니까.”

여자는 잡히지 않은 손으로 천천히, 아주 천천히 코트 깃을 젖혔다. 깃 안쪽에 작은 배지가 있었다. 열쇠 두 개가 교차한 문장(紋章). 그 아래 라틴어 한 줄.

“파켐(Pacem).”

여자가 말했다.

“평화라는 뜻입니다. 존재하지 않는 기관이죠. 존재하지 않으니까, 소개가 늦었습니다.”

성당 뒤뜰. 최 신부가 차를 내왔고, 이번에는 잔이 셋이었다. 여자는 수녀복이 아니라 회색 코트 차림 그대로 앉아 있었다. 레아라고 했다. 성은 말하지 않았다.

“단도직입적으로 하죠. 전 돌려 말하는 훈련을 받았지만 그걸 싫어해요.”

레아는 찻잔에 손도 대지 않았다.

“바티칸은 그 별을 압니다. 어제오늘 일이 아니에요.”

“언제부터.”

“기록상으로는 사백 년. 천문대를 세운 이유 중 하나였으니까. 비공식적으로는—”

그녀는 최 신부를 흘긋 보았다. 노사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천 년입니다. 박사들이 돌아간 뒤로, 교회는 그 별이 다시 울 때를 기다리는 자들을 대(代)를 이어 두었습니다. 등대지기처럼.”

“당신이 그 등대지기입니까.”

“전 등대지기들의 계산을 검산하는 사람이죠. 천체물리로 박사를 했고, 지금은 신호를 분석합니다.”

레아는 가방에서 태블릿을 꺼내 탁자에 놓았다. 화면에 파형 그래프가 떴다.

“석 달 전, 별이 울기 시작했어요. 삼장일단. 우리 관측소 여섯 곳이 동시에 잡았습니다. 문제는.”

화면이 넘어갔다. 두 번째 파형. 비슷하지만 달랐다. 장이 둘, 단이 둘.

“방송에 도는 가짜.”

운학이 말했다.

레아의 눈썹이 올라갔다.

“벌써 아셨군요. 예. 위조입니다. 정교하지만 원본과 가락이 달라요. 그런데 이 위조 데이터가 전 세계 민간 관측 네트워크에 심어졌습니다. 서버 침투 흔적도 없이. 마치 처음부터 거기 있었던 것처럼.”

그녀는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위조를 하려면 원본을 알아야 합니다. 원본 신호의 존재를 아는 건 지구상에 우리뿐이라고 생각했어요. 석 달 전까지는.”

“지금은.”

“해독자가 둘이라는 걸 압니다.”

레아가 손가락 두 개를 세웠다.

“별의 가락을 몸으로 받아 적을 수 있는 사람. 하나는 지금 제 앞에서 차를 마시고 있죠. 문제는 다른 하나예요.”

운학의 찻잔이 허공에서 멎었다.

“다른 하나는 원본을 압니다. 알면서 비틀었어요. 종말의 가락으로. 그리고 그 가락에 맞춰 지금 세 대륙에서 사람들이 서로의 신전을 불태울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레아의 목소리는 조금도 높아지지 않았는데, 그래서 더 서늘했다.

“우리가 가진 그자의 자료는 위성 사진 한 장뿐입니다. 십이 년 전, 파미르 고원.”

태블릿 화면이 다시 넘어갔다.

설산의 능선. 흐릿한 인영 하나. 확대되어 뭉개진 화소 속에서도, 운학은 그 서 있는 자세를 알아보았다. 왼발에 무게를 싣고 오른어깨를 반 치 여는, 별을 볼 때의 자세. 사문(師門)의 관성 자세였다. 그리고 그 손에 들린 것—부러진 옥 간의의, 나머지 반쪽.

운학은 아주 오래 침묵했다. 뒤뜰의 겨울 햇빛이 한 뼘 옮겨 갔다.

“이름을 아십니까.”

이윽고 그가 물었다.

“모릅니다. 우리는 그를 ‘검은 별’이라 부릅니다. 그들이 스스로를 부르는 이름을 따서요. 흑요성회(黑曜星會).”

레아는 태블릿을 껐다.

“당신이 그를 아는 것 같군요.”

운학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 대신 소매 속 죽통의 무게를 느꼈다. 그 안의 옥 조각. 오래전 산을 먼저 내려간 사람. 같은 하늘을 보던 사람.

최 신부가 침묵을 거두어 갔다. 노사제는 운학의 빈 잔에 차를 따르며, 처음으로 공적인 목소리를 냈다.

“안드레아. 로마의 벗이 청한 만남이 이것입니다. 이제 수녀님이 마저 전하시지요.”

레아가 일어섰다. 그리고 품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탁자에 놓았다. 밀랍 인장이 찍힌, 이 시대의 것 같지 않은 봉투였다.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기관은 초대장도 이렇게 옛날식입니다.”

그녀가 말했다.

“로마로 와 주십시오, 가스파르 형제.”

가스파르. 별을 따라 서쪽에서 온 세 박사 중 첫째의 이름이었다.

그날 밤 운학은 사제관 뒷방 창을 열고 하늘을 보았다. 도시의 불빛 너머에서 별이 울었다. 장, 장, 장, 단. 그는 창턱에 장단을 받아 적다가 문득 손을 멈추었다. 십이 년 전 파미르의 인영이 눈에 밟혔다. 같은 가락을 받아 적었을 다른 손이.

같은 별을 보고 한 사람은 산을 내려왔고, 한 사람은 세상에 불을 놓으려 한다.

별은 무어라 울고 있는가. 따르라는 것인가, 지배하라는 것인가.

운학은 밤이 깊도록 창가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