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장 백이십 년 만의 속세
산을 내려오는 데 이틀 밤이 걸렸다. 서울까지는 사흘째 아침이 걸렸다. 경신술로 능선과 능선을 건널 때 그의 몸은 바람과 다투지 않았으나, 국도에 내려서는 순간부터는 모든 것이 그와 다투었다.
가장 먼저 그를 막아선 것은 문이었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끝, 은빛 기둥들이 늘어선 관문. 사람들은 품에서 얇은 패를 꺼내 기둥 위에 대었고, 기둥은 새 울음 같은 소리를 내며 그들을 통과시켰다. 부적을 대어 결계를 여는 이치였다. 운학은 그 이치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다만 그에게는 부적이 없었다.
그는 기둥 앞에 서서 손바닥을 그 위에 얹고, 기감을 실어 지그시 눌렀다.
기둥은 붉게 울었다. 삑, 삑, 삑. 세 번 짧게. 불길한 장단이었다.
“어르신, 카드 찍으셔야 돼요.”
역무원이라는 젊은이가 다가와 그를 옆의 넓은 문으로 안내했다. 짐이 많은 자와 늙은 자를 위한 문이라 했다. 운학은 자신이 둘 중 어느 쪽으로 보였는지 잠시 생각했다. 죽통 하나에 지팡이 하나. 짐은 아닐 것이었다.
“백이십 년이면,”
그는 혼잣말로 결론지었다.
“늙은 것이 맞지.”
지하를 달리는 쇠 수레 안에서 사람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손바닥만 한 빛나는 판을 들여다보며. 처음에 운학은 그들이 일제히 무언가를 애도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판 속에서는 음악이 흘렀고 사람이 웃었고 음식이 익었다. 옆자리 아이가 판을 기울이자 그 속의 작은 사람이 절벽을 뛰어넘었다.
거울 속에 세상을 담아 소매에 넣고 다니는구나. 운학은 감탄했다. 백이십 년 사이 인간은 축지 대신 축세(縮世)를 익힌 모양이었다. 세상을 줄여 손안에 넣는 술법. 다만 그 술법의 대가로 사람들은 고개 드는 법을 잊은 듯했다. 수레가 강 위 다리를 건너는 동안, 창밖으로 노을이 강물을 통째로 물들였는데, 고개를 들어 그것을 본 사람은 운학 하나였다.
밤이 되어 그는 남산 자락 소나무 아래 앉았다. 도시의 불빛이 하늘의 별을 반나마 지워 놓았으나, 그의 눈을 지우지는 못했다. 자미원 곁, 그 별.
장, 장, 장, 단.
그는 무릎에 손가락으로 받아 적었다. 산에서보다 간격이 좁아져 있었다. 급해지고 있었다.
이튿날 그는 요기를 위해 불야성처럼 밝은 작은 점포에 들어갔다. 밤새 문을 닫지 않는 가게라 했다. 편의(便宜)를 파는 곳. 선반의 물건들은 하나같이 반질거리는 갑옷을 입고 있었다. 그는 주먹밥 하나를 집어 들고 셈을 치르려 소매에서 엽전 꾸러미를 꺼냈다. 상평통보였다.
점원은 엽전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이거…… 어디서 파는 굿즈예요?”
값을 셈하는 데 실패한 대신, 운학은 점원 뒤편 텔레비전이라는 거울에서 값진 것을 얻었다. 화면 속에서 사람들이 광장에 모여 울부짖고 있었다. 자막이 흘렀다. ―종말의 별 목격담 확산, 중동·유럽 곳곳 소요. 화면이 바뀌어 밤하늘 사진이 떠올랐다. 조악하게 찍힌 광점 하나. 그러나 운학의 눈은 그 광점의 위치를 정확히 읽었다.
자미원 곁. 그의 별이었다.
같은 별을 두고 누군가는 이미 곡(哭)을 시작했다. 별은 아직 아무 말도 마치지 않았는데.
그는 주먹밥을 내려놓고 가게를 나왔다. 점원이 뒤에서 뭐라 외쳤으나, 엽전 한 닢을 계산대에 올려 둔 것으로 셈은 되었으리라 여겼다. 되지 않았다는 것을 그는 알지 못했다.
그날 밤에도 별은 울었다. 장, 장, 장, 단. 간격이 또 좁아졌다. 그리고 처음으로, 별빛의 가장자리가 탁했다. 맑은 물에 먹 한 방울이 번지듯. 누군가 그 빛에 손을 대고 있었다.
사흘째, 그는 별이 미끄러져 온 궤적의 끝을 지상에 대어 보았다. 관성술은 하늘의 일을 땅에 겹쳐 읽는 술법이다. 궤적의 연장선이 도심 한복판, 언덕 위의 한 건물에 닿았다. 뾰족한 첨탑 둘이 하늘을 향해 손을 모은 집.
명동성당이었다.
그는 언덕을 올랐다. 저녁 미사가 끝난 시각, 성당의 문은 열려 있었다. 그는 문지방 앞에서 잠시 멈추었다. 남의 신을 모신 집이었다. 도가의 예로 읍(揖)을 한 번 하고, 그는 들어섰다.
향 냄새가 났다. 태백산의 향과 다른, 그러나 같은 곳을 향해 타는 냄새.
텅 빈 회중석. 돌기둥. 높은 천장. 그리고 서쪽 벽면에—
빛.
스테인드글라스라 부르는 유리 그림이었다. 저녁의 마지막 볕이 그것을 통과해 바닥에 색을 눕히고 있었다. 세 사람. 낙타. 그리고 그들의 머리 위에 별 하나.
운학의 걸음이 멎었다.
별의 둘레에 광선이 새겨져 있었다. 그는 세었다. 긴 광선. 긴 광선. 긴 광선. 짧은 광선. 다시 긴 광선 셋. 짧은 광선 하나. 유리 조각의 배열이 별의 사방을 돌며 같은 가락을 반복하고 있었다.
장. 장. 장. 단.
그의 손이 죽통을 열었다. 성도를 꺼냈다. 펼쳤다. 무릎이 저절로 꺾여 그는 회중석 바닥에 앉았다. 종이 위 그의 기록. 유리 위 이천 년의 기록. 겹쳤다. 어긋난 데가 없었다.
같은 별이었다. 같은 노래였다.
이천 년 전에도 이 별은 울었다. 그때는 박사 셋이 들었다. 지금은—
심장이 뛰었다. 백이십일 년 동안 자시마다 느려지던 심장이, 처음으로 제멋대로 뛰었다.
등 뒤에서 발소리가 났다. 느리고, 무겁고, 지팡이 끝이 돌바닥을 짚는 소리가 섞인. 운학은 돌아보지 않았다. 기감이 먼저 말해 주었다. 적의가 없는 사람. 촛불처럼 조용히 타는 사람.
늙은 사제는 그의 곁에 멈추어, 그가 펼쳐 든 성도와 유리창의 별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오래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금도 놀라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별을 보셨군요.”